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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육해공을 가리지 않고 지구를 누볐던 세 사람이 있습니다
새로움의 역사는 도전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축복입니다. 하늘과 바다, 그리고 대지에서 한계라고 이름 붙여진 경계를 넘어 길을 개척하고 세계 지도의 역사를 새로 쓴 이들을 알고 계신가요? 육해공을 넘나들며 지도를 뒤바꿨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영국 탐험가의 후손 패트릭 버겔
거대한 얼음 땅을 녹인 열정의 시간
l 남극을 횡단하겠다는 꿈은 오랜 시간이 지나 결국 이루어졌습니다
육지의 약 98%가 평균 두께 1.6km의 얼음으로 덮여 있고 영하 수십 도에 이르는 살인적 추위가 생명을 위협하는 지구상의 최남단 땅, 남극. 이 미지의 영역을 밝히기 위한 탐험가들의 발길은 20세기 초부터 이어졌습니다.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은 용감하게 도전했고 철저하게 깨졌지만 ‘위대한 실패’라고 불리는 남극 탐험의 신화를 남겼습니다. 1909년 세계 최초로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최남단인 남위 88도 23분에 도달한 그는 남극점까지 도달하기 위해 1914년 다시 탐험대를 꾸렸습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극한의 상황에 맞닥뜨렸습니다. 남극점을 155km 남겨두고 섀클턴은 목표를 남극 횡단에서 전 대원의 생환으로 고쳐 잡았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작은 보트에 몸을 실어 1,000여km나 떨어진 출발점으로 돌아가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덕분에 27명 대원 모두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2016년 12월 4일, 섀클턴의 외증손자 패트릭 버겔이 100여 년 만에 그의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기 위해 혹한의 남극에 섰습니다. 현대자동차 싼타페를 타고 남극 유니언 캠프에서 남극점을 지나 맥머도 기지까지 왕복 총 5,800km를 횡단했습니다. 스타트업 CEO인 버겔은 탐험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현대자동차는 그를 지원할 특별팀을 꾸리고 전문가의 자문을 거쳐 위험 가능성이 높은 지역들을 세밀하게 점검했습니다. 또한 버겔은 횡단에 앞서 아이슬란드에서 10일간 혹한기 훈련과 주행 훈련 등을 별도로 받았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설원뿐인 남극 대륙 위에서 진행된 30일간의 여정은 생생하게 기록됐습니다. 현대자동차는 ‘탐험가 섀클턴, 남극 횡단 100년의 꿈을 이루다(Shackleton’s Return)’라는 제목의 영상을 유튜브와 현대자동차 글로벌 캠페인 웹사이트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했습니다. 이번 탐험은 현대자동차에게도 의미 있는 도전이었습니다. 양산차 최초로 남극 횡단에 성공한 기록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세대를 연결하고 고객의 꿈을 응원하는 삶의 동반자라는 브랜드 철학을 실현한 기회였습니다. 얼음 대륙을 가로지른 패트릭 버겔과 현대자동차의 뜨거운 열정은 세대를 이어 ‘위대한 성공’을 낳았습니다.
조선의 홍어장수 문순득
바다 위 표류가 꽃피운 역사
l 바다를 떠돌았던 문순득의 이야기는 조선의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1801년 제주 당포항에 낯선 배 한 척이 표류했습니다. 당시 여송국이라 불렀던 필리핀 사람들이 타고 있었지만 조선에는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이가 없었습니다. 9년이 흐른 어느 날, 드디어 이들과 말이 통하는 조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그를 ‘나주 흑산도 사람 문순득’이라고 적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필리핀어 통역사, 문순득은 원래 서남해의 특산품인 홍어를 사다가 나주 영산포에 내다 팔던 상인이었습니다. 1802년 1월 흑산도 인근에서 풍랑을 만난 그는 현재의 오키나와에 위치했던 류큐국까지 떠밀려 갔습니다. 9개월 뒤 고향을 향해 다시 배를 탔지만 거센 파도는 그를 필리핀에 내려놓았습니다. 다시 9개월 만에 상선을 타고 중국 마카오에 도착했고 이후 광둥, 난징, 베이징을 거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3년 2개월에 걸쳐 동남아시아를 한 바퀴 돌아 조선 땅을 밟은 셈입니다. 조선 역사상 최장거리, 최장기간의 표류였습니다.
당시 흑산도에서 유배 중이던 정약전이 이 전대미문의 표류담을 95쪽 분량의 <표해시말>에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책의 말미에는 100여 개가 넘는 류큐어와 필리핀어가 우리말과 비교돼 실려 있는데, 험난한 표류와 이국 땅에서의 낯선 생활에도 좌절하지 않고 현지의 언어와 풍속을 익히며 희망의 실마리를 찾았던 문순득의 열린 태도와 강인한 정신에 대한 내용도 함께 실려있습니다. 정약전은 이런 문순득에게 개국 이래 처음으로 세계를 돌아보고 왔다는 의미에서 ‘천초(天初)’라는 호를 지어주고 평생 가까이했습니다. 유배된 이후 정약전의 학문적 궤적을 보면 책상머리에서 쥐어짜낸 관념이 아닌, 현실에서 직접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문순득의 놀라운 표류 경험과 앞선 세계관은 양반과 상인이란 신분을 뛰어넘는 교류의 연결고리가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약전을 비롯한 조선 후기 학자들에게 더 넓은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자극을 불어넣는 계기를 제공하며 실학이라는 변화의 역사가 시작되는 이정표가 됐습니다.
미국의 비행기 조종사 아멜리아 에어하트
하늘의 퍼스트레이디가 남긴 전설
l 아멜리아 에어하트는 하늘의 지도를 바꾼 사람 중 하나입니다
라이트 형제가 동력 비행기를 타고 12초 동안 하늘을 날았던 최초의 비행 이후 비행기 조종사를 꿈꾸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아멜리아 에어하트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여자아이’에게 기대되는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어 나무 타기와 야구 시합을 즐겨 했던 그녀는 우연히 접한 비행에 매료돼 조종사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당시는 항로뿐 아니라 항공지도나 항법시설 등이 전무했던 시절이라 자신이 어디를 날고 있는지조차 알기 힘든 때였습니다.
비행은 곧 목숨을 건 도전이자 모험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산 경비행기를 몰고 새로운 항로를 찾아 미국 전역을 날아 다니며 조금씩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1928년 에어하트에게 2명의 남자 조종사와 함께 대서양 횡단 비행에 도전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비행은 성공했지만 그녀는 단순 동승에 불과했습니다.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감자 자루처럼 비행기에 실려갔을 뿐’이었습니다. 에어하트는 1932년에 단독 비행에 도전했고, 고도계와 엔진의 고장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약 6시간 단축된 14시간 56분 만에 횡단에 성공했습니다. 여성 단독 대서양 횡단 비행이라는 의미 외에 대서양 최단시간 횡단이라는 의미까지 담긴 기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에어하트를 ‘창공의 여왕’, ‘하늘의 퍼스트레이디’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추켜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계획에 착수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적도를 따라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약 4만 7,000km의 비행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1937년 6월 미국 마이애미에서 출발해 대서양을 건너 아프리카, 아시아를 거쳐 남태평양까지 약 3만 5,000km의 비행에 성공한 그녀는 한 달 뒤 태평양 한복판 날짜 변경선 지점에서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그녀의 마지막 도전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도전 정신만큼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위대하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녀가 개척한 것은 푸른 창공 위의 새로운 하늘길뿐 아니라, 사회의 통념으로 가로막힌 여성의 가능성을 여는 물꼬였습니다.
글. 김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