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쏘나타 뉴 라이즈를 타고 남해와 광양으로 떠났습니다
코끝의 시림이 가시더니 언젠가부터 꽃내음이 머뭅니다. 봄이 왔다는 신호입니다. 옷이 얇아진 만큼 움직임은 활발해집니다. ‘되도록 멀리 떠나야 한다’는 명제에 몸이 긍정적으로 응답합니다. 따뜻한 남쪽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섬진강을 경계로 경상도와 전라도가 마주하는 곳, 남해와 광양으로 떠났습니다.
아름다운 섬으로 이뤄진 따뜻하고 소박한 마을, 남해군
l 남해는 섬으로 이뤄진 따뜻한 마을입니다
경상남도의 남쪽 끝이자 서쪽 끝. 인구 약 5만 명의 남해군은 아름다운 남해 바다에 있는 섬들로 이뤄진 마을입니다. 섬과 섬 사이는 크고 작은 다리가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날씨가 워낙 따뜻해 겨울에도 눈이 거의 오지 않습니다. 눈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어 2005년 폭설이 왔을 땐 그야말로 대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지요.
l 남해는 차분하고 조용히 방문객을 반깁니다
조선 성종 시절 만들어진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은 남해를 가리켜 ‘솔밭처럼 우뚝한 하늘 남쪽의 아름다운 곳’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창선대교를 지나 입도하니 남해가 고즈넉한 표정으로 손님을 반깁니다. 시계 초침에 모래주머니를 단 듯 모든 풍경이 한가하기 그지없습니다. 사람에 치여 사는 대도시의 삶을 위로받으며 천천히 가속 페달을 밟습니다.
l 남해는 영화관이 단 하나밖에 없는 조그마한 마을입니다
한때 남해읍내에 극장 한 곳이 있었지만, 1970년대 후반 수익을 내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영화 요금보다 차비를 더 들여가며 진주까지 가서 영화를 관람해야 했지요. 그러다 지난해 남해문화체육센터에 ‘보물섬 시네마’가 들어서면서 남해에 유일무이한 상영관이 생겼습니다. 다행한 일입니다.
l 독일마을은 파독 교포들을 위해 마련한 곳입니다
섬 동부 삼동면에는 독일마을이 있습니다. 1960년대에 산업역군으로 독일에 파견된 교포들이 한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고, 독일의 이국문화를 경험하는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조성된 곳입니다. 드라마 <환상의 커플>의 촬영장소로도 유명한 이곳은 독일 교포들이 직접 독일에서 건축부재를 수입해 전통적인 독일 양식 주택을 건립한 곳입니다. 바로 앞에는 천연기념물 제 150호로 지정된 방조어부림의 시원한 바다가 펼쳐지고, 남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드라이브 코스로 꼽히는 물미해안도로도 곁에 있습니다.
l 남해 금산은 ‘일점선도’라 일컬을 만큼 아름다운 섬 속의 산입니다
남해 금산은 조선의 문신 김구가 신선이 사는 섬의 한 점, 즉 ‘일점선도(一點仙島)’라고 일컬었을 만큼 아름다운 섬 속의 산입니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예부터 금강산에 빗대 ‘남해의 소금강’이라고 부를 만큼 경치가 빼어나지요.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이곳에서 산신에게 기도하며 임금이 되면 이 산을 비단으로 감싸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뒤 은혜를 갚기 위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두르려 했지만 쉽지 않았고, 대신에 산 이름을 금산이라고 바꿔줬다고 합니다. 금산 보리암을 바라보며 이성복의 시 <남해금산>의 한 구절을 읊어봅니다.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l 4월의 남해 멸치는 육질이 쫀득거리고 맛이 좋습니다
4월로 접어들면 남해군 미조항의 멸치잡이 배들은 한껏 흥이 오릅니다. 남해 멸치는 물살이 빠른 곳에서 놀기 때문에 육질이 쫀득거린다고 어부들은 자랑합니다. 오후 3시즈음 싱싱한 멸치를 한 가득 싣고 들어오는 멸치잡이 배를 보노라면 고두현의 시 <남해 멸치>가 떠오릅니다.
오 아름다운 비늘들
죽어야 빛나는
생애
l 남해는 모든 풍경이 한 폭의 그림과 같습니다
무수히 많은 곶과 만이 얽힌 푸른 남해 바다의 그림 같은 섬들, 고요하고 평화로운 포구의 풍경, 멀리 또 가까이 떠 있는 어선들이 드문드문 박힌 점들,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모든 선들이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로 그려져 펼쳐집니다.
l 육지와 바다가 이루는 선이 모두 절경을 이루는 남해를 떠나 광양으로 향합니다
자, 이제 서쪽으로 차를 달려 광양으로 가봅니다.
노량해전과 백두대간의 끝, 관음포
l 남해에서 광양으로 가는 길, 그곳엔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협이 있습니다
남해군에서 광양시로 향하는 길목, 남해대교가 놓인 곳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협입니다. 이곳은 노량해전의 종결지이며, 백두대간의 끝입니다. 노량해전 당시 일본 수군이 큰 바다인 줄 알고 들어간 사지 관음포도 바로 이곳, 남해군에 있습니다.
l 관음포는 조선과 일본의 마지막 해전이 벌어진 곳입니다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에는 ‘관음포 이충무공전몰유허지’가 있습니다. 얕고 규칙적인 파도가 넘실대는 이곳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고니시가 거느리는 일본 수군의 마지막 해전이 벌어진 곳입니다. 왜군의 총탄에 죽어가면서도 “싸움이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던 이순신 장군의 비장한 유언이 서린 곳이기도 하지요. 노량해전을 끝으로 1598년, 조선을 폐허로 만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막을 내립니다. 5백여 년이 흐른 후, 관음포는 사뭇 달라졌습니다. 관음포 둑방길 일대에서는 봄꽃 축제가 열려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바다 건너 광양제철소에서는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이끈 철강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봄꽃이 눈처럼 내리는 곳, 광양 매화마을
l 매화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새하얀 꽃의 설국이 펼쳐집니다
지리산 자락을 굽이굽이 흘러 남해바다로 흘러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면 매화나무가 지천으로 펼쳐져 있는 매화마을이 있습니다.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어느새 우리의 시선은 차가운 색에서 따뜻한 색으로 필터를 교체합니다. 마을의 농가들은 산과 밭에 곡식 대신 매화나무를 심었습니다. 하얗게 만개한 매화꽃은 마치 함박눈 마냥 나무에 살포시 내려앉습니다. 매화는 지난한 겨울의 끝, 꽃의 계절이 왔음을 알리는 봄의 첫 작품입니다.
l 매화마을에서는 매년 3월마다 매화축제가 열립니다
매화마을에서는 매년 3월마다 매화축제가 열립니다. 매화꽃이 만발하는 축제기간에는 전국에서 몰려드는 상춘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지만, 1년에 딱 한 번 순백의 절경을 두 눈에 담을 수 있는 매화꽃 잔치는 놓치기 아쉬운 절경입니다. 굽이치는 섬진강의 물살과 희끗희끗한 알맹이들,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내리는 빛의 산란은 빼곡한 붓터치로 근사한 풍경화를 그려냅니다.
l 매화마을의 발원지인 청매실농원은 꽃구경에 으뜸입니다
봄의 전령 매화가 이 마을에 들어선 건 오래지 않은 일입니다. 도사리마을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청매실농원은 꽃구경에 으뜸입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의 배경이 되기도 한 이곳은 매화마을의 발원지입니다. 청매실농원의 주인 홍쌍리 여사는 40여 년 전 다압면에 시집 와 쓸모 없는 땅이라 여긴 황무지에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섬진강의 온화한 강바람과 알맞게 피어 오르는 물안개는 매실농사에 적격이었고, 마을 주민들은 홍 여사를 따라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l 남쪽으로 떠나세요. 2017년 봄은 여러분에게 특별한 선물이 되어줄 것입니다
얼음이 녹으면, 누군가는 물이 된다고 말하고 다른 누구는 봄이 온다고 말합니다. 봄이라는 계절이 그렇습니다. 기다린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지요. 당신의 봄은 어떤가요? 바쁜 일상 속에 찾아온 봄을 그냥 가벼이 보내지는 않았나요? 짧은 봄을 만끽할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않았나요? 바라건대 올 봄은 여러분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동차 시동을 켜세요. 그리고 남쪽으로 떠나세요. 2017년 봄은 여러분에게 특별한 선물이 되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