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보헤미아 왕국을 간직한 체스키 크롬로프의 풍경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동쪽으로 290km 떨어진 노쇼비체에는 현대자동차의 생산 공장이 있습니다. 무려 33만 대 규모의 현대자동차가 생산되는 곳입니다. 2018년에는 체코 대학생들이 가장 취업하고 싶은 기업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는데요. 공장을 둘러보고 나니 궁금증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열심히 일한 후, 체코의 직장인들은 어디로 여행을 떠날까요? 노쇼비체에서 다시 서쪽으로 400 여 km 떨어진 곳, 체코인들이 사랑하는 작은 마을 체스키 크롬로프가 있습니다. 그 옛날, 보헤미아의 사람들이 지나온 길들도 여전히 남아있는 곳입니다.
체스키 크롬로프의 골목 전경
처음으로 혼자 떠난 여행의 끝 무렵이 떠올랐습니다. 정확히는 긴 여행 후 귀국을 앞둔 마지막 밤이었습니다. 떠나기 아쉬운 마음을 어찌할 줄 몰랐고, 그저 도시의 성벽을 만지며,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모를 돌계단을 세어 걸으며 밤을 꼬박 보냈던 기억.
우연히 체코의 체스키 크롬로프 사진을 마주했을 때, 기억 속에 파묻혔던 그날이 불쑥 고개를 들었습니다. 사진 속에는 블타바 강이 휘도는 가운데 서로 엉겨 붙은 구시가지와 몇 세기의 세월이 겹겹이 내려앉았을 오렌지색 지붕이 있었습니다. 햇볕이 어른거리는 건물 벽, 빛바랜 그림들도 도시의 시간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체코의 오솔길'이라는 이름의 체스키 크롬로프
물길을 따라 세워진 체스키 크롬로프의 건물
프라하에서 차로 2시간 반. 열심히 달리다 보면 순식간에 창밖 풍광이 달라지는 때가 옵니다. 그럼 체스키 크롬로프에 다다른 것입니다. 13세기, 지역 귀족이 터를 잡고 성을 짓기 시작하며 그 역사가 시작된 도시. 중세 유럽으로 돌아간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할 정도로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구시가 안에는 18세기 이후 지어진 건축물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2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블타바 강이 보이는 테라스에서 오후의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
도시에 가까워질수록 블타바 강도 가까워집니다. 물길을 따라 세워진 건물 테라스에는 저마다 오후의 햇살을 즐기러 나온 이들이 앉아있습니다. 지어진 지 300년도 훌쩍 넘은 중세의 건물들이 즐비하건만, 누구도 으스대지 않는 분위기가 좋습니다. 내리쬐는 볕이며 사람들의 소음도 모두 그러안는 너그러운 풍경. 가까이에 보이는 체스키 크롬로프 성의 전망대도 도시를 다정히 내려다보는 듯합니다.
멀리 보이는 체스키 크롬로프 성의 전망대
체스키 크롬로프를 찾는 많은 여행자들이 당일 치기 코스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물가에 앉아 커피만 마셔도 반나절이 금방 흐를 것 같은데, 하룻밤을 보낸다 해도 아쉬울 터. 가벼운 옷차림과 걷기 편한 신발. 두 가지면 여행 준비는 끝입니다. 골목골목을 들여다보며 이 도시의 진짜 매력을 찾아볼 생각이었습니다. 오래 걷게 된대도 좋았습니다. 해가 저물 무렵엔 물가의 카페에서 쉬어가면 되니까요.
수백 년 동안 모습을 지켜온 체스키 크롬로프의 골목
‘이발사의 다리’라 불리는 목조 다리를 건너야 비로소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입니다. 다리 너머의 처음 마을이 만들어질 때부터 있던 비탈길을 지나고, 수백 년 동안 자리를 지키며 수공예품을 만드는 가게를 구경할 참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드나드는 빵집에서는 고소한 빵 냄새가 흘러나옵니다. 발걸음 닿는 곳으로, 체스키 크롬로프 속으로 가 봅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체스키 크롬로프
체스키 크롬로프 여행자를 위한 가이드
체스키 크롬로프 성
체스키 크롬로프 성
여행은 역시 체스키 크롬로프 성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13세기 보헤미아 지역 귀족 가문인 비테크(Vitek) 가문이 이곳에 터를 잡으며 지은 것으로 체코에서는 프라하 성 다음으로 규모가 큽니다. 성의 주인은 로젠베르크(Rosenberg) 가문으로 바뀌었다가, 17세기에는 보헤미아 왕 루돌프(Rudolf)가 왕국의 소유로 매입했습니다. 수 세기에 걸쳐 주인이 바뀌고, 증축된 덕에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 등 여러 양식의 건축물들이 모여 있는 독특한 미관을 자랑합니다. 성의 하이라이트는 전망대입니다. 160개가 넘는 계단을 오르는 수고 정도는 말끔히 잊을 만큼의 절경이니, 전망대는 빼놓지 말고 올라가 보세요.
체스키 크롬로프 망토 다리
망토 다리
체스키 크롬로프 성의 상부와 하부를 연결해주는 다리. 넓게 펼쳐진 모양이 마치 어깨에 걸치는 망토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습니다. 3층 높이의 다리로, 15세기 처음 지어질 때만 해도 목조다리였는데 지금은 석재 위에 다리가 놓여있습니다. 각 층에 나 있는 유려한 선의 아치가 인상적입니다. 목조다리였을 시절에도 워낙 견고하게 지어진 터라 말을 타고 다리를 건너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망토다리 아래에서 그 위용을 감상해도 좋지만, 다리 위로 오르는 것도 좋은 방법. 마을의 지붕과 고즈넉한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큽니다.
스보르노스티 광장
‘스보르노스티’는 체코어로 ‘화합’을 의미합니다. 구시가지 중심에 위치한 아담한 광장입니다.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시대에 지어진 낮은 건물들이 공간을 감싸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대부분 지역에서 이름난 가문들의 집으로 사용되던 곳들입니다. 지금은 시청과 경찰서 등으로 그 쓰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영화 <아마데우스>의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에곤 실레 아트센터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아트센터도 체스키 크롬로프에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나고 자란 곳이자 젊은 날을 보내며 작품 활동을 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과 생애를 적나라한 방법으로 표현한 그는 젊은 나이에 삶을 다했지만 이 마을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아트센터 내부에는 그의 생애와 작품 활동에 대한 설명을 비롯해 직접 제작한 검은 침대와 책상, 거울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