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필연에 대한 두 에세이를 준비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우연과 필연의 경계를 오갑니다. 여러분은 우연과 필연 중 어느 쪽에 마음이 더 기우나요? 두 필자의 이야기를 통해 물리학과 영화 속 우연과 필연의 줄타기를 알아봅니다.
우연은 어디에나
물리학에서는 우연과 필연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오늘 점심으로 무얼 먹을지는 이미 결정돼 있습니다. 생각도 물질에서 비롯하니 고전역학의 어쩔 수 없는 귀결입니다. 모든 입자의 위치와 속도 정보가 주어지면 미래는 딱 하나로 ‘결정’됩니다. 점심 메뉴로 짜장면을 떠올렸다가 짬뽕으로 바꿨다고 해서 자유의지가 발현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바꿀 것도 이미 결정돼 있습니다. 고전역학 체계 안에 우연은 없습니다. 이미 결정된 필연인데 능력 부족으로 아직 알지 못할 뿐입니다. 결국, 우연은 현재 인간 능력의 한계에 붙여진 이름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능력이 일취월장할 미래에 우연은 없습니다. 기계적 결정론을 따르는 뉴턴의 고전역학에서는 모든 것이 필연입니다.
동의하시나요? 그럴듯해 고개를 끄덕이자니 찜찜함이 남습니다. 물리학자들도, 20세기 이전 어느 누구도 위 주장에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우연이 있다는 것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모든 것이 필연으로 보이는 물리학에서 우연의 숨통을 틔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그리고 카오스 이론의 예측 불가능성입니다.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불확정성 원리입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위치를 정확히 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눈앞에 커피 잔이 바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요? 인식론이나 뇌과학 질문이 아닙니다. 커피 잔의 위치를 눈으로 볼 때 관여하는 물리 현상을 묻는 물리학 질문입니다. 빛이 커피 잔에서 반사돼 눈으로 들어오고, 눈동자의 망막에 상이 맺힙니다. 커피 잔을 보려면 빛이 필요합니다. 빛과의 상호작용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양자역학과 고전역학의 차이는 물체가 ‘크냐’ 혹은 ‘작냐’입니다. 커피 잔처럼 큰 물체를 다루는 고전역학에서는 빛이 반사해도 물체가 끄떡없습니다. 전자처럼 아주 작은 입자를 다루는 양자역학의 세상은 다릅니다. 빛이 전자에 충돌해 반사하면 전자는 속도가 크게 변합니다. 비유해보겠습니다. 앞에 놓인 전봇대가 어디 있는지, 여기저기 탁구공을 던져보면 눈 감고도 알 수 있습니다. 탁구공에 맞아도 전봇대는 끄떡없습니다. 고전역학의 얘기입니다. 양자역학은 길 위에 놓인 탁구공의 위치를 탁구공을 던져 알아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던진 탁구공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 길 위의 탁구공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탁구공에 맞은 길 위의 탁구공 속도는 크게 변합니다. 탁구공의 위치를 알아내면 탁구공의 속도가 변합니다. 모든 입자의 위치와 속도가 주어지면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이 고전역학입니다. 양자역학은 이 문장의 가정, ‘입자의 위치와 속도가 주어지면’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하나를 알면 나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입자의 위치와 속도가 동시에 정확히 결정될 수 없습니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는 뉴턴 고전역학의 결정론이 아주 작은 세상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줬습니다.
20세기 후반, 고전역학이 이야기하는 필연은 같은 고전역학 체계 안에서 도전을 받습니다. 카오스의 발견입니다. 광화문 앞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탁구공이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 날아가 일주일 뒤 하나는 부산, 하나는 여수에서 발견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카오스 이론입니다. 물론 광화문 앞에서 두 개의 탁구공을 ‘정확히’ 같은 위치에 놓으면 일주일 뒤 같은 장소로 날아갑니다. 그런데 ‘정확히’는 얼마나 ‘정확히’일까요? 광화문 앞 탁구공의 위치를 소수점 아래 10자리로 아주 정밀하게 측정해도 소수점 아래 11번째 자리가 1이냐 2냐에 따라 탁구공은 일주일 뒤 전혀 다른 곳으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처음 상태의 아주 작은 차이가 증폭되어 미래에 큰 차이를 만든다는 것이 카오스 이론입니다. 결정돼 있다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정론과 예측 가능성은 다른 얘기입니다.
‘입자의 위치와 속도가 주어지면 미래가 하나로 결정되어 있다’는 19세기 물리학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닙니다. 양자역학은 위치와 속도를 함께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을, 카오스 이론은 위치와 속도를 아무리 정확히 측정해 알아내도 결국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줬습니다. 많은 이가 물리학에서는 모든 것이 필연으로 결정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다릅니다. 물리학에도 우연은 도처에 있습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 점심 메뉴를 저는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제 맘입니다. 물리학에서나 삶에서나, 우연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글.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우리 사회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바라보는 연구에 관심이 많습니다. 열린 마음과 통계물리학을 통해 복잡한 세상과 인간관계를 꿰뚫어 보고자 합니다. 그 통찰을 담아 <경향신문>에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우연한 역설 혹은 운명
영화사 속 우연과 필연의 순간을 만나봅니다
어쩌면 우연과 필연의 연관성을 따지는 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질문처럼 흥미롭지만 도돌이표 같은 부질없는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 인과를 살필 수밖에 없는 건 그것이 세상의 변화를 서사적으로 납득시키기 때문입니다. 동시대에서 가장 강력한 서사적 유희를 전달하는 오락 영화 역시 우연을 통해 잉태된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1895년 12월 29일, 프랑스 파리에 자리한 한 카페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입장료 1프랑을 낸 그들 앞에는 텅 빈 벽이 있었습니다. 곧 불이 꺼졌고, 텅빈 벽에서 기차가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몇몇 사람은 뒤로 달아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이 대중 앞에 첫선을 보이는 자리였습니다. 시네마, 즉 영화라는 의미를 최초로 품고 통용된 이 단어는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시네마토그라프’라는 카메라 영사기에서 빌려 왔습니다. 이는 작은 구멍을 통해 오직 한 사람만 움직이는 사진을 볼 수 있었던 토머스 에디슨의 영사기의 단점을 보완한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여러 사람이 동시에 움직이는 사진을 관람하도록 이끈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은 인류 최초의 영화 상영작이었던 셈입니다.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라는 매체를 발명해낸 첫 번째 감독이라면, 영화에 예술성을 불어넣은 첫 번째 감독은 조르주 멜리에스일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마술사로 활동하던 그는 1896년 영국인 발명가 로버트 윌리엄 폴에게 영사기를 구입해 개조한 뒤 영화를 촬영하기 시작했습니다. 멜리에스의 영화는 일상적인 풍경을 기록한 뤼미에르 형제의 결과물과 결이 달랐습니다.
그는 영화사에 있어서 최초의 장르를 제시한 감독입니다. 하지만 멜리에스는 처음부터 그런 시도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시도는 우연한 발견에서 비롯됐습니다. 어느 날 오페라 극장 앞 광장에서 촬영을 하던 중 갑자기 카메라가 작동을 멈췄습니다. 다시 카메라를 작동시켜 촬영을 이어나갔는데, 그 뒤 필름을 현상하던 멜리에스는 예기치 못한 장면을 보게 됩니다. 길을 지나가던 마차가 갑자기 영구차로 변한 것입니다. 거리를 지나가던 마차의 모습을 포착한 카메라가 작동을 멈췄고, 촬영을 재개할 당시 카메라 앞을 지나던 영구차의 모습이 이어진 결과였습니다. 촬영을 재개한 순간 영구차가 카메라 앞을 우연히 지나간 덕분에 얻어낸 장면이었습니다. 멜리에스는 이를 흥미로운 힌트라 여겼습니다.
멜리에스는 ‘트릭 영화’라고 불리는 장르를 개척했습니다. 1912년까지 5,000편이 넘는 영화를 촬영했고, 다양한 기술적 시도를 이어나갔습니다. 페이드와 디졸브, 고속 촬영, 이중 노출 등 오늘날 익숙한 영화적 특수효과는 당시 멜리에스의 작품을 통해 발굴된 영화적 유산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는 영화가 기록의 산물이 아니라 연출과 편집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지는 수많은 촬영술과 편집술은 멜리에스의 우연한 발견을 통해 탄생한 것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우리가 즐기는 현대의 영화들은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기술적 토대 위에서 멜리에스가 발견한 예술적 가능성이 결실을 맺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는 후대의 감독들이 영화 연출과 편집에서 다양한 시도와 발견을 이어갈 수 있었던 최초의 단서이자 영감이 됐습니다. 사실 뤼미에르 형제가 <기차의 도착>처럼 존재하는 현실을 기록한 작품만 남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물 뿌리는 정원사>와 같은 작품처럼 코믹한 상황을 연출한 결과물도 남겼습니다. 하지만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가 대중적으로 각광받는 예술 혹은 오락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모두가 알다시피 뤼미에르 형제의 예견과 다른 현실로 나아갔습니다. 어쩌면 영화에 있어서 가장 큰 우연이란 바로 이런 역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민용준 영화&대중문화 칼럼니스트글 혹은 말로, 지면 혹은 방송에서, 주로 영화나 음악에 관한 견해를 전달하고 있지만 대중문화나 시사에도 참견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으니 게으르게 살아남아 보려 노력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