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만 혹은 여자만 해야 하는 일이 있을까요?
남자나 여자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에게서 편견에 맞서는 법을 배워봅니다.
불리함을 유리함으로 바꾼 가구 디자이너 소목장세미
유혜미 디자이너
조소에서 목공으로
후암동 ‘초판서점’의 운동장 트랙 진열대, 기다란 바 형태의 금속 문진, 카페 ‘LUFT’의 트레이 등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디자인으로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가구를 제작하는 이가 있습니다. 바로 ‘소목장세미’로 불리는 유혜미 디자이너입니다. 홍대에서 조소를 전공한 그는 우연히 조선 목가구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목공의 매력에 빠지게 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손재주를 지녔던 그는 자신이 쓸 가구를 직접 만들게 됐고, 주변 친구들의 가구를 하나둘 만들어 주던 것이 조금씩 입소문을 타면서 취미로 하던 일이 돈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7년 동안 순수미술을 공부하던 그가 목공으로 커리어를 바꾸게 된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조소를 좋아했지만, 미래가 불투명했기 때문입니다. 목공은 맞춤 제작이었기 때문에 바로바로 돈이 들어오는 것에 반해 조소는 정확히 그 반대 지점에 있었습니다. 목공 일은 그에게 금전적인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재료를 살 돈이 들어오면, 그는 클라이언트의 요구대로 잘 만들기만 하면 됐습니다. 전문적으로 목공 일을 배우진 않았지만, 조소과였기 때문에 가구를 만드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톱, 드릴 등 기본적으로 연장을 쓸 줄 알았고, 테이블 소 같은 기구의 사용법은 유튜브를 통해 배웠습니다. 그렇게 기구를 쓸 줄 알게 되면서 그가 다루는 가구들도 점차 늘어나게 됐습니다.
작업실 한쪽에는 가구를 만드는 데 필요한 각종 공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중성적인 디자인의 가구
유년 시절의 ‘세미’라는 이름과 작은 나무를 다루는 장소라는 뜻의 ‘소목장’이 만나 ‘소목장세미’라는 1인 가구 공방이 만들어졌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시작했지만, 일이 점차 많아지면서 함께 하는 동료들도 조금씩 생겼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영향으로 밤낮없이 떠들썩한 문래동 작업실이지만, 이곳에 대부분의 거래처가 있어 떠나기 힘들다는 그. 문래동에서 자리를 지킨 지 벌써 6년째입니다. 목공 재료와 작업 중인 가구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작업실 안에서 그만이 만들 수 있는 섬세한 가구들이 탄생했습니다. 소목장세미의 가구는 이사할 일이 많은 1인 세대에게 잘 맞는 조립형 가구라는 특징도 있지만, 그가 생각하는 가장 큰 특징은 중성적인 느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가구만 놓고 봤을 때 이게 남자가 만든 건지, 여자가 만든 건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 투박한 듯 섬세한 매력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거기에 현대적인 느낌과 옛것의 느낌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합니다.
가구를 제작하는 것 외에도 인테리어 설계 쪽으로 작업을 확장해가고 있는 소목장세미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은 마루 작업입니다. 9월에 한글박물관에서 예정된 전시에서는 한글을 패턴화시킨 마루를 선보일 예정이랍니다. 소목장세미에서는 기본적으로 데스크, 스툴, 테이블 등 다양한 가구를 다루지만, 최근에는 인테리어까지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습니다. 가구를 만드는 것과 인테리어 설계 일은 비슷한 듯 달랐습니다. 가구는 사용자의 니즈에 맞게 잘 만들어 보내면 끝이지만, 인테리어 일은 변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습니다. 바닥이나 벽의 강도 등 외적인 것들도 모두 고려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테리어의 경우, 좀 더 신중하게 일을 받는 편입니다. 확실히 그에게 결정권이 많고, 하고 싶은 걸 이해해주는 클라이언트와 작업하고자 합니다.
편견을 극복하는 방법
지금은 인식이 바뀌었지만 보통 목수라는 역할은 오래전부터 남성이 해왔습니다. 그랬던 탓일까요. 그에게도 보이지 않는 편견은 존재했습니다. 여자가 가구를 만든다는 것을 의아해했고, 심지어 가구의 안전성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는 그런 편견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런 시선에 맞서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결과물로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흔히 목수는 여자가 하기 힘든 직업이라고 말합니다. 무겁고 큰 재료를 써야 하므로 체력적으로 무리가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말합니다. “제가 만든 가구는 만듦새의 섬세함이 달라요. 디자인의 경우, 선의 굴곡 등을 날렵하게 빼는 디테일이 확실히 다르죠.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똑똑하게 잘 만드는 것 같아요. (웃음) 왜냐하면 신체적으로 불리한 조건이 있다 보니 머릿속으로 설계와 도면을 확실하게 구축해놔야 하고 재료를 제가 직접 들어야 하니까 분해와 조립이 가능하게 만들어야 해요.” 그래서 그가 만든 가구는 분리와 조립이 쉽고, 가벼우면서도 실용적입니다. 신체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이용해 자신만의 강점으로 바꾼 것입니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예술경영지원센터의 팝업 아트숍 프로젝트의 팻말
유혜미의 다양한 일
유혜미는 목공 일 외에도 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랑 밴드의 멤버로도 활동하며 틈틈이 DJ도 겸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3일만 작업실에 출근하고, 나머지 시간은 미팅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등 자신만의 시간을 지키려고 애씁니다. 그렇게 체력을 비축해야 좀 더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활동을 해나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역시 가구를 만드는 일입니다. 작업은 고되지만, 만들고 나면 항상 기분이 좋고, 보람이 됩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이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도마 만들기 수업을 하면서 든 생각인데, 저는 만드는 사람이니까 나뭇값만 내면 여러 가지 디자인으로 생선용 도마, 빵 용 도마, 치즈 도마 등 다양한 걸 만들 수 있잖아요. 아름답고 실용적인 것들을 곁에 두다 보니, 그게 제 삶의 질을 높여주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 직업이 굉장히 만족스러워요.” 최근에는 조명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는 그는 조명 라인도 하나 론칭했습니다. 가구와 마찬가지로 가벼우면서도 분리와 조립이 가능하다고.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많아, 하고 싶은 게 많다는 유혜미. 여전히 세상은 여자 목수에게 편견의 잣대를 들이대지만, 불리한 점을 강점으로 만든 그의 삶은 편견을 깨부수고 싶어 하는 모든 이에게 분명 유의미한 사례이자, 따르고픈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아무리 두꺼운 것이라도 균열이 시작된 편견은 언젠가 깨지기 마련이니까요.
플로리스트 김웅의 경계
플로리스트 김웅
꽃의 역할
1990년대에 개봉한 <미스터 플라워 Bed Of Roses>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꽃집을 운영하는 남자 주인공은 매번 직접 배달을 하는데, 이유를 묻는 이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사람들의 얼굴을 보려고 배달하죠. 사랑에 빠진 얼굴, 화난 얼굴, 슬퍼하는 얼굴, 꽃을 받는 사람들 모두 아름다워요.” 꽃을 받는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하나같지 않고, 심지어 꽃을 받고도 화나고 슬플 수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꽃의 역할은 참 다양합니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은 꼭 축하나 애도의 의미가 아니더라도 기분에 따라, 인테리어에 맞춰 꽃을 삽니다. 그러나 한국은 꽃의 영향력이 아직은 미미하고, 그것을 선물하는 성비 또한 고립적입니다. 고전 영화만 봐도 늘 남성이 꽃을 사 오고 여성은 과장스럽게 기뻐하며 화병에 꽃을 담습니다. 별거 아닐 수 있지만 만약 그 행동이 오랫동안 이어졌다면, 성의 역할로 고착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김웅은 말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드라마나 영화에 큰 영향을 받는데, 특히 백마 탄 왕자님 캐릭터에 환호하고 계속 비슷한 캐릭터가 만들어지고 있잖아요. 생각해보니까 제가 꽃집에서 일할 때도 남자한테 꽃을 선물하고자 온 여자 손님이 한 명도 없었어요. 저라면 되게 기쁠 것 같은데 말이죠.”
소담한 꽃과 화병이 모여있는 진열장
과거와 현재의 편견
김웅은 많은 여성들과 일합니다. 대부분의 플로리스트가 여성이고, 일반적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꽃을 다루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 꽃을 주는 건 주로 남자였고 받는 건 여자였으니, 이후엔 오롯이 여자의 몫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남자들도 꽃을 잘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남자가 할 일, 여자가 할 일이 나뉘어 있었잖아요. 꽃 일은 더더욱 그렇고요. 외국엔 남성 플로리스트가 굉장히 많아요. 또한 남성이 운영하는 꽃집에 손님이 오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사장님 어딨어요?’ 예요. 남자가 꽃집 사장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는 거죠.” 그러나 김웅은 남성으로서 그렇다 할 차별이나 편견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마저도 남성의 특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솔직한 행동을 관찰하고 있으니 어떤 의미를 더하고 있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서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나중에 결혼을 하면 아내도 같이 일을 했으면 좋겠거든요. 모든 일에 성별을 나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작업할 때 사용하는 리본과 가위
코워킹 스페이스 같은 작업실
그는 ‘플라워 워크숍 코리아’라는 단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영국이나 벨기에 등 유명 플로리스트가 있는 곳에 학생들을 인솔하여 원활한 수업을 돕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짧은 유학이라고 보면 됩니다. 보통 일주일 정도 진행하는데, 3일은 수업을 듣고, 2일은 자유 일정, 나머지 날엔 유명한 플라워 마켓이나 정원을 구경하러 갑니다. 물론 해외에서만 진행되는 건 아닙니다. 서울과 제주에서 워크숍을 열기도 하지만 장소를 찾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워크숍의 재료가 ‘꽃’이다 보니 수업 환경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수업을 들으러 오는 학생들이 공간 자체만으로 쉼을 얻길 바라기 때문에, 날이 좋을 땐 밖에서 수업을 하고, 웬만하면 장소가 노출되지 않은 색다른 곳을 추구합니다. 지금의 스튜디오에선 수업보다 주로 개인 작업이 이뤄집니다. 빛이 잘 들어오는 창가에서 일을 하고, 나머지 공간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쓰는데, 한편의 공간은 보자기 수업을 하는 선생님이 사용합니다. 가끔은 그의 프리랜서 친구들이 찾아와 함께 일을 하거나 와인을 마시기도 합니다. 마치 코워킹 스페이스처럼 말입니다. “주로 빛이 있는 곳에 있어요. 날 좋을 때 문을 열어놓고 작업하면 바람이 솔솔 들어와서 기분이 좋거든요. 또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 때도 있어요. 이 골목은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아 편해요.”
오롯한 꽃이 되기까지
서른에 플로리스트 일을 시작한 김웅은 이전에 모델이었고, 그 이전엔 럭비선수였습니다. 부상과 모델의 짧은 수명으로 인해 기술을 배우고자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패션과는 멀어지기 어려워 그나마 근접한 플로리스트를 택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지난날에 비해 지금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편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아뇨. 그때가 좋았어요. 피로와 고통은 되게 심플하다고 생각하는데, 사업을 하고 나이가 들면서 정신적인 문제가 육체적으로 전이되다 보니 또 다른 고통이 오더라고요. 운동할 땐 그저 열심히만 하면 됐거든요. 사실 저는 도시생활이 잘 안 맞아요. 요즘엔 오래된 것을 무너뜨린 자리에 바로 새로운 것을 올리잖아요. 그렇게 되면 사람들 또한 매번 새로운 옷만 걸친 인스타그래머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유야 어찌 됐든 지금의 김웅이 있기까지 이전의 직업은 그에게 헛된 일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럭비라는 운동이 그의 체력과 정신력을 길러줬고, 모델 일은 꽃을 표현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익숙하고 편한 것을 뒤로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압니다. 서른 살에 꽃을 잡은 김웅은 럭비선수이자 모델이었던 이십 대의 김웅에게 어떤 식으로든 위안을 주었을 것입니다. 꽃은 인간의 삶을 짧게 압축시킨 거나 다름없으므로 꽃이 지는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았을까요. 가냘픈 잎이 떨어지고나면 결국 강한 잎들만 남으니 말입니다.
그저 플로리스트
엉뚱한 이야기 같지만 저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장화를 주면서 프러포즈하고 싶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 또한, 성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지만 이렇게라도 그 경계가 서서히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김웅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맞아요.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 먼저 표현하는 거죠. 그런데 지금 깨달았는데, 좀 전에 남성으로서 편견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잖아요? 제가 일하는 곳에선 여자라서, 여자이기 때문에 일을 못하는 여성을 본 적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다들 일을 잘하고, 무거운 것도 번쩍번쩍 들고요. 그냥, 동등한 사이인 거죠.” 인터뷰를 마치고, 젠더 뉴트럴이라는 이슈로 김웅을 선택한 것도 어찌 보면 하나의 편견임을 깨달았습니다. 여성의 비율이 많은 플로리스트 일을 하는 그에게 ‘편견이 없을 거라는 편견’ 말입니다. 편견은 스스로 깨우쳐야지만 변화할 수 있고, 그 변화는 평등으로 가는 시발점이자 움직임이 됩니다. 나는 꽃을 매개로 36세 플로리스트 김웅과 평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앞으로 플로리스트 김웅 앞에 ‘남성’이라는 단어가 숨어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같은 의미로 여의사, 여배우 등의 단어도 사라지는 날을 꿈꿉니다.
▶ 해당 콘텐츠는 이노션 월드와이드 사외보 Life Is Orange 2019년 여름호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