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오혜진 씨(필리핀), 박자야 씨(몽골), 도인혜 씨(몽골), 악지라 씨(카자흐스탄), 션주링 씨(중국)
고향도 문화도 다르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만나 모두가 이웃이 됐습니다. 글로벌 시대, 이제 한국에서 다문화는 특이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일상의 풍경입니다. 하지만 다문화라는 한 단어로 이주민의 정체성을 정의하기는 많이 아쉽습니다. 다문화 가정을 향한 이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5명의 이주여성이 각자의 출신 국가 이야기를 동화로 풀어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로 동화를 짓다
출신 국가의 동화를 담았습니다
유난히 추웠던 어느 겨울날, 서울 종로에 있는 한 북카페 테이블 위에 알록달록 고운 빛깔의 동화 원화 여러 장이 펼쳐졌습니다. 원화는 그림을 책으로 엮기 전 상태의 원본. 작품을 만든 창작자들은 다름 아닌 한국에 정착한 이주여성들입니다.
현대차 정몽구 재단은 한국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자리한 다문화가정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2013년부터 서울시와 함께 ‘다문화 인식개선 사업’을 진행해왔습니다. 사업의 일환인 이중언어 동화집은 처음 한국의 전래동화를 수록한 동화집을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 베트남어, 몽골어, 러시아어 등 10개 언어로 번역·배포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는 이주여성들이 직접 자녀들에게 출신국의 전래동화를 들려줄 수 있도록 제작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2017년에는 시대 흐름을 반영해 멀티미디어 동화집을 만들어 더 많은 사람이 동화집을 이용할 수 있는 환경도 구축했습니다.
2018년에도 재단과 서울시는 ‘다(多)가치, 다(多) 같이 2018 어린이 책 공모전’을 열어 그림책과 이야기책 2개 분야에서 12팀의 당선자를 선발했습니다. 오늘 인터뷰에 참여한 악지라 씨(카자흐스탄), 오혜진 씨(필리핀), 션주링 씨(중국), 박자야 씨(몽골), 도인혜 씨(몽골) 등 5명의 이주여성 동화작가들이 바로 그 당선자들. 출신 국가의 이야기를 자신의 필체와 그림체로 풀어낸 시간은 이들에게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그들은 총 8주 동안 매주 토요일 한자리에 모여 현직 동화작가들로부터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듣고 동료들과 함께 계속해서 작품을 수정했습니다. 남다른 열정으로 똘똘 뭉쳐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덕분에 누구 한 사람 뒤처지지 않고 모두 멋진 결과물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각각의 작품은 이중언어 동화집으로 엮어 올해 초 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출신 국가의 전래동화를 그림으로 표현하다
직접 손으로 그리고 써서 만들어낸 책들입니다
2001년에 한국에 정착한 박자야 씨는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몽골의 전래동화를 그림책으로 만들었습니다. 몽골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한국에서 전공을 살려 직업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 하지만 그녀는 2017년에 다른 이야기책 작가와 협업해 해당 작품의 삽화를 그리는 등 꿈을 놓지 않았고, 2018년에 비로소 자신이 주도해서 만든 작품 <배움의 은혜>를 선보였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모르는 게 참 많았습니다. <배움의 은혜>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배우며 준비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 몽골의 전래동화예요. 그 뜻이 저에게도 깊은 깨달음으로 다가와 이 이야기를 선택했습니다.”
2000년에 한국에 온 도인혜 씨 역시 몽골 출신입니다. 같은 몽골 출신인 박자야 씨와는 몽골에서 바로 옆 건물에 살았지만 당시에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답니다. 두 사람은 한국에 와서 ‘동화’를 매개로 비로소 한자리에서 만났습니다.
“마감 하루 전에 공모전 소식을 접했어요. 서둘러 제가 제일 좋아하는 몽골 전래동화를 골라 스케치를 그려 신청서를 냈습니다. 그게 바로 <지혜로운 며느리> 였어요. 교훈이 있으면서도 중간중간 유머가 들어가 사실 제 부족한 실력으로는 풀어내기가 쉽지 않았어요. 혼자였다면 중도에 포기했을 텐데, 여러 사람과 함께하다 보니 의지가 많이 되더라고요. 덕분에 무사히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한국에 왔다가 한국인과 결혼하면서 정착하게 된 션주링 씨는 한창 동화책을 읽을 나이인 자녀를 생각하며 이번 공모전에 응모했습니다.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해 한국 전래동화를 연구하기도 했던 션주링 씨는 알려지지 않은 중국 동화를 발굴하는 데 주력했고, 그 결과 <석향로(노반 이야기)>를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한국에 이미 소개된 중국 동화들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그런데 중국 항저우 인근에 서호 제1경으로 통하는 ‘삼담인월’에 얽힌 노반 이야기에 관해서는 모르는 분이 아직 많더라고요. 중국의 명소를 소개하면서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더 잘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겨났다는 이들. 어려울 때마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서로를 다독이며 끝내 자신의 재능을 아름답게 꽃피웠습니다.
다채로운 문화적 배경을 이야기로 나누다
다른 나라의 동화로 서로를 이해하고 배웁니다
과거 필리핀 전래동화 번역에 여러 차례 동참했던 오혜진 씨도 이번 기회를 통해 동화작가로 데뷔했습니다. 오혜진 씨가 직접 창작한 <마르코와 엄마>는 가족을 떠나 해외로 취업하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이 제가 쓴 책을 읽고 ‘슬프다’는 감상을 이야기하더라고요. 사실 우리 딸은 저와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다고 하거든요. 불가피하게 식구들과 떨어져 생활하는 필리핀 사람들의 애환이 이야기를 통해 전해진 것 같아 보람과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번 공모전을 통해 동화작가로 데뷔한 이들 가운데는 유학생도 있습니다. 2015년에 연세대학교에 입학해 심리학을 전공한 악지라 씨는 다문화 이슈에 관심이 많습니다. 다문화가정을 향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고 싶다는 바람으로 공모전에 참여했다는 그녀. 출신 국가인 카자흐스탄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이들이 많아 이번 기회를 빌려 사람들에게 카자흐스탄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답니다.
“제가 이번에 쓴 작품의 제목은 <제비 꼬리는 왜 두 갈래가 되었을까>인데요. 한국인들에게 이 제목을 말해주면 “제비 꼬리가 양 갈래였나?” 하고 되물어요. 그런데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자연을 향한 관찰력이 뛰어나고 그 변화를 이야기로 설명하는 데 능숙하거든요.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카자흐스탄 사람들의 태도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동화집 발간을 준비하는 동안 스스로 느끼고 배운 것도 많습니다. 자신의 출신 국가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다른 작가들의 출신 국가와 문화도 새롭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공감이 자신들의 울타리 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사회의 모두가 균형 잡힌 시선으로 다문화가정을 바라봐주길 기대합니다.
그렇기에 이들 이주여성 동화작가가 우리 사회에 선보일 작품들은 출신 국가의 전래동화를 옮겨 담은 단순한 활동 결과가 아닙니다. 공동체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자신을 표현하는 희망의 기록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기서 끝이 아닌 ‘다음’을 바라봅니다. 더는 낯설지 않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그려나가기 위해서.
글. 정라희
사진. 김경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