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르도 라틀리프가 아닌 라건아로 돌아왔습니다
2012년부터 3연속 우승을 이루고 팀을 떠났던 ‘라틀리프’ 선수가 3년 만에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유니폼을 다시 입었습니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라건아’로서. 그 사이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를 대표해 뛰기도 했고, 평양을 방문해 친선 경기도 치렀습니다.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20번 라건아. 외국인 선수가 아닌 대한민국 농구 선수로서 이제 첫 시즌이 막 시작됐습니다.
라틀리프, 라건아가 되어 돌아오다
한국에서 처음 농구를 시작했던 현대모비스로 돌아왔습니다
무더위가 지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이면, 선수들의 심장이 뛰기 시작합니다. 무더운 여름을 견디며 차곡차곡 쌓아온 실력과 열정을 코트 위에서 맘껏 분출할 시간, 그들의 ‘쇼타임’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10월 13일,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이하 현대모비스) 홈 경기장. 2018-2019 프로 농구의 시작을 알리는 개막 경기가 열리는 날이자, 라건아 선수가 현대모비스 유니폼을 입고 다시 팬들 앞에 서는 날입니다. 그는 현대모비스 유니폼을 입고 세 시즌 내내 우승을 이루며 팬의 절대적 신뢰와 사랑을 받았던 외국인 선수였습니다. 3년 만에 다시 돌아온 친정팀은 여전했습니다.
식당 밥은 없던 입맛도 찾아줄 만큼 여전히 맛있었고, 유재학 감독은 여전히 ‘만 가지 수’를 가지고 선수단을 이끌었습니다. 3년 전 함께 뛴 동료와의 호흡도 여전했고, 함께 만들어낸 승리는 변함없이 짜릿했습니다.
유일하게 달라진 게 있다면 유니폼에 새겨진 그의 이름입니다. 3년 전에는 외국인 선수 ‘라틀리프’였다면, 지금은 ‘라건아’라는 이름을 단 귀화 선수가 됐습니다. ‘라틀리프’를 연호하던 팬은 여전히 신뢰와 애정을 담아 ‘라건아’를 외칩니다.
“태어나서 30년 가까이 불렸던 이름인데, 더 이상 코트 위에서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서운한 느낌도 들더라고요. 물론 그보다는 기쁘고 설레는 마음이 더 크죠. 팬들이 ‘라건아’를 부를 때마다 ‘외국인 선수가 아닌 국내 선수로 동료들과 함께 뛰고 있구나’를 실감하게 되거든요.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미묘한 순간이었죠.”
지난 3년간 상대팀에서 활약하는 라건아 선수의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아쉬움, 혹은 서운함을 털어내려는 듯, 경기 내내 ‘라건아’를 외치는 팬들의 함성이 퍼집니다.
라건아 선수는 이번 시즌 1호 20-20(20득점, 20리바운드) 기록을 세우며 ‘개막전 역대 최다 점수 차’로 팀의 첫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팬의 오랜 기다림과 뜨거운 환영에 답하는 그만의 방식입니다.
대한민국 여권을 가지고 싶어요!
농구에 대한 열정이 그를 한국에 오게 했고 또 한국인이 되게 했습니다
라건아 선수는 최초의 귀화 농구 선수입니다. 2017년 1월 1일 경기 직후 “대한민국 여권을 가지고 싶다”는 말로 귀화 의사를 밝혔고, 이듬해 2018년 1월 귀화가 결정됐습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라건아 선수가 밝힌 귀화 이유는 단순하고도 명확했습니다. “국가를 대표해 농구를 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2012년 그가 한국행을 택한 이유가 그러했듯, 이번 선택의 중심에도 역시 ‘농구’가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육상을 했었는데, 농구를 하던 동네 친구랑 내기를 하게 됐어요. 한 번은 달리기를, 한 번은 1:1 농구 시합을 했죠. 달리기는 당연히 이겼는데, 문제는 농구도 제가 이긴 거예요. 심지어 그날 농구를 처음 해봤는데 말이죠. 그렇게 농구의 매력에 빠졌고, 농구는 제 삶을 바꿔놓았어요.”
농구를 만나면서 어려운 환경을 탓하며 일삼던 일탈도 멈췄습니다. ‘좋아하는 농구로 밥벌이도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실력이 쑥쑥 자랐고, 그의 인생 계획에 없던 대학에도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프로의 벽은 높았습니다. NBA 드래프트에 실패했고, 현대모비스 입단을 결정했습니다. 단 한 가지 이유, 농구를 계속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현대모비스에서 세 시즌을 보내면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훌륭한 감독님, 동료와 함께하며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고요. 무엇보다 2014년 7월 대만에서 열린 윌리엄 존스컵 국제농구대회에 출전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어요. 다른 나라는 국가대표들이, 한국은 시즌 우승팀인 현대모비스가 나라를 대표해 나갔는데, 매 경기가 쉽지 않았어요. 부상 선수도 많아 5명으로 경기를 치러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결국 우승했죠. 국가를 대표해 뛴다는 것, 그 벅찬 감정을 처음 느꼈어요.”
SNS를 통해 ‘우리나라를 대표해 멋진 경기를 펼쳐줘서 감사하다’는 팬들의 인사가 전해졌습니다. 라건아 선수는 “어쩌면 그때 그 감정이 귀화를 결정하게 된 계기였을지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가슴에 단 태극마크의 무게
2018 아시안 게임에서 태극마크를 달았습니다
대한민국 여권을 발급받은 그해 8월, 라건아 선수는 아시안 게임 출전을 위해 자카르타로 출국했습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자격으로 말입니다. 농구를 시작하면서부터 막연하게 간직했던 국가대표의 꿈을, ‘태극마크’를 달고 이루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매 경기, 모든 순간이 여전히 생생하게 떠올라요. 그중에서도 필리핀과 겨뤘던 8강전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경기를 치루기 전부터 필리핀의 승리를 예측하는 기사들이 연이어 쏟아졌거든요. 참 슬프더라고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우리 선수를 좀 더 믿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죠. 그래서 더 열심히 뛰었어요.”
이 경기에서 라건아 선수는 30득점 15리바운드로 맹활약했고, 한국 대표팀은 ‘절대적 열세’라는 평가를 딛고 필리핀에 91-82로 승리했습니다. 비록 4강전에서 아쉽게 탈락해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지만,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뛴 여름날의 기억은 라건아 선수에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아쉬움이 커요. 분명 우리 팀은 더 잘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국민의 응원을 받으며 뛰었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거예요. 다음에는 꼭 국가대표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싶어요.”
진짜 꿈은 현대모비스 영구 결번 선수
현대모비스는 그에게 친정 같은 곳입니다
한국인 ‘라건아’로서 함께할 소속팀은 2018년 4월, 특별 드래프트를 통해 결정됐습니다. 현대모비스를 포함 총 3개 팀이 라건아 선수 영입에 나서 단 한 번의 추첨으로 그의 소속팀을 결정한 것입니다.
“미국에서 가족과 식사를 하면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SNS를 통해 ‘현대모비스 입단을 축하한다’는 팬들의 메시지가 쏟아지더라고요. 사실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어요. 저도 가족도 막연하게 현대모비스로 갈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거든요(웃음).”
‘라틀리프’란 이름으로 현대모비스에 입단한 2012년, 당시에 그는 철저하게 이방인이었습니다. 급하게 배운 한국말은 “안녕하세요” 한마디뿐이었고, 음식도 훈련 방식도 함께하는 동료들도 모두 낯설었습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그는 현대모비스를 ‘친정팀’이라 부를 만큼 한국 생활에 익숙해졌습니다. 양념갈비와 갈비탕을 좋아하고, 훈련 후 동료들과 카페에서 마시는 핫초코 한 잔은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경기가 없는 날에는 2015년 한국에서 태어난 딸 레아와 함께 키즈카페를 찾습니다. 딸을 위해 늦잠의 달콤함을 기꺼이 포기하는 ‘딸 바보’ 아빠입니다.
팀의 우승과 영구결번, 모두 이뤄내길 바랍니다
팀 동료 모두와 두루두루 잘 지내지만 특히 양동근, 새넌 쇼터, 문태종 선수는 코트 안에서도, 밖에서도 죽이 잘 맞습니다. 이대성 선수와는 아시안 게임에서 국가대표로 함께 뛰며 부쩍 친해졌는데, 요즘은 함께 맛집을 찾아다닐 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냅니다.
“우리는 강한 팀이고 좋은 팀이에요. 3년 전 함께했을 때처럼 호흡도 잘 맞고, 실력은 그때보다 더 성장했죠. 제가 골밑에 들어가면 상대 팀 2~3명이 수비를 하는데, 그때가 우리 팀에게는 슛 찬스가 된다고 생각해요. 공격은 물론이고 어시스트로 최대한 동료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합니다.”
다시 돌아온 현대모비스에서 라건아 선수가 바라는 목표는 팀의 우승입니다. 더 나아가 국가대표로 국민들에게 금메달을 안겨주고 싶고, 은퇴 후에는 팀의 코치로 좋은 선수를 키우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농구 선수로 하고 싶은 일이 가슴에 많이 담겨 있어요. 그중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꿈은 제 등번호 20번이 우리 팀의 영구 결번이 되는 거예요. 그러려면 팀과 팬 그리고 저 스스로도 납득할 수 있는 ‘멋진 농구’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단은 이번 시즌 현대모비스의 V7(7연승)부터 이루고 차근차근 준비하겠습니다.”
글. 박향아
사진. 김경록 벙커 스튜디오